일기

무쇠는 어떻게 재가 되었나: 사랑이라는 이름의 착취에 대하여

오픈에어워커이기도 2025. 8. 12.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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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표면적으로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 곁을 평생 지킨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제주의 푸른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수십 년의 연대기는 향수를 자극하고, '저런 사랑도 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 따뜻한 색감의 필터를 걷어내고 인물들의 관계를 직시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이것은 숭고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한 사람의 실존이 다른 한 사람의 욕망을 위한 연료로 남김없이 연소되는 과정을 담은 섬뜩한 기록이다. 사랑이라는 가장 친밀한 이름으로 자행된 착취와 방관에 관한 보고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무쇠' 관식과 '요망진' 애순이 있다. 젊은 시절의 애순은 욕심 많고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었기에, 그녀의 이기심은 미성숙의 한 형태로 이해될 여지라도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고, 관계와 삶의 무게를 아는 나이가 된 이후에도 이 기형적인 관계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더 교묘하고 당연하게, 애순의 모든 꿈과 자식의 미래는 관식의 희생을 담보로 설계된다. 관식은 더 이상 한 명의 남자가 아니라, 가정을 유지하고 애순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무한히 땔감을 넣어야 하는 아궁이 같은 존재가 된다.
 
 
 
가장 섬뜩한 지점은 애순의 '인식된 방관'이다. 그녀는 관식이가 어떤 사람인지, 이타심이라는 이름의 자기 파괴적 성향을 가진 그가 어떻게 자신을 소진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관식이 골병들어 죽어갈 것을 그녀는 몰랐을까? 아니다,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이기심을 넘어, '자식의 성공'이라는 맹목적인 신화에 사로잡힌 어리석음의 발로였다. 애순 역시 잘못된 교육 철학과 헛된 기대감에 자신의 삶을 소진하고 있었다. 관식의 육신이 자식의 미래를 위한 땔감이었다면, 애순의 정신과 시간 역시 그 땔감을 관리하고 더 많이 밀어 넣기 위해 함께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자식이 관식이처럼 살았다면 애순은 어땠을까. 아마 멱살을 잡아서라도 그 삶을 멈춰 세웠을 것이다. 이 이중잣대 앞에서 관식은 사랑하는 남편이 아니라, 고마운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이것은 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상식의 문제 아닐까?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 즉 본질을 만들어가야 하는 주체적 존재다. 이런 관점에서 관식과 애순의 삶은 모두 비극이다. 관식의 존재는 애순의 욕망을 위해 동원되었고, 애순의 존재 또한 '자식의 성공'이라는 허상을 위해 스스로를 옭아맸다. 두 사람 모두 사랑과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독립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실존적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들의 헌신은 자기실현이 아닌, 각기 다른 방식의 자기 소멸 과정이었다.
 
 
 
결국 드라마는 한쪽은 육신이, 다른 한쪽은 영혼이 재가 된 후에야 멈춰버린 어리석은 질주를 보여준다. 애순이 얻은 평온한 노년은 자아실현의 승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태우고 난 뒤의 공허한 정적에 가깝다. 그 시간은 무엇으로 얻어졌는가. 두 사람의 인생 전체를, 비합리적인 믿음과 헛된 기대를 위해 함께 태워 얻은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한 명의 희생양과 한 명의 수혜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잘못된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다 함께 파멸한, 두 어리석은 인간의 슬프고 무서운 비극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우리에게 묻는다. 한 사람의 완전한 희생 위에 세워진 다른 한 사람의 평온을, 우리는 과연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가.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꿈을 위한 연료로 쓰이는 관계를, 우리는 과연 가족 또는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가. 드라마는 우리 주변의 당연하게 여겼던 수많은 '관식이들'과 '애순이들'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당신의 세상에서, 당신은 누구의 희생 위에 서 있으며, 또 어떤 헛된 신념을 위해 당신 자신을 태우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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